특례상장 심사 허들이 높아지자 뛰어난 기술·사업모델(BM)을 가지고도 특례 제도 활용 없이 일반 상장을 추진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거래소가 특례상장 추진 기업의 사업 지속성이나 지배구조, 산업 안정성 등 여러 비정량 조건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내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상장을 반려하고 있는 영향이다. 혁신적인 기술을 기반으로 높은 성장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특례상장 제도를 활용하지 않는 기업이 잇따르면서 일각에서는 제도가 ‘사문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전체 등록 특허의 최상위 등급에 해당하는 ‘AAA’ 특허를 보유한 디비로보틱스는 최근 기술특례상장 추진을 접고 일반 상장에 나서기로 했다. 1999년 설립된 디비로보틱스는 해양·원자력 분야 산업 특화 로봇과 극한환경 속 인명을 구조하는 로봇을 개발·제조하는 로보틱스 기업이다. 기술보증기금이 AAA 등급을 부여한 특허 1건을 비롯해 AA 등급 등 총 65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2022년 NH투자증권를 상장 주관사로 선임한 후 2023년부터 코스닥 시장 기술특례상장 트랙을 밟기 위한 각종 준비 작업을 해왔다.
디비로보틱스가 일반 상장 트랙으로 선회한 것은 최근 크게 높아진 기술특례상장 난도 때문이다. 상장 추진 기업이 기술특례상장에 나서려면 전문 평가 기관에서 A 등급과 BBB 등급 이상의 기술성 평가 등급을 받아야 하는데 회사 측은 이 과정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다만 특례상장에서 최근 매출을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만큼 차라리 매출을 늘려 이르면 내년 일반 상장에 나서기로 방침을 정했다. 기술특례상장은 기업의 기술 수준을 평가해 당장 이익이 나지 않아도 높은 성장 잠재력이 있으면 상장 기회를 주는 제도이며, 일반상장은 매출 등 현 시점 실적을 보다 중점적으로 본다.
2000만 명 이상의 국내 가입자를 보유한 ‘삼쩜삼’ 운영사 자비스앤빌런즈의 경우 지난해 사업모델 특례상장에 시도했다가 미승인 판정을 받은 후 일반 상장에 나서는 것을 저울질하고 있다. 사업모델 특례상장은 적자 기업이어도 독창적인 사업모델을 가지고 있으면 증시에 상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삼쩜삼은 추후 일반 상장에 나서는 것이 규제 리스크 등이 부각될 수 있는 사업모델 특례상장을 추진하는 것보다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삼쩜삼은 지난해 상반기 매출 777억 원, 세금 환급 중개액 6378억 원 등 법인 설립 이래 최대 실적을 거둬 추후 일반상장 추진 동력이 붙을 수 있다.
거래소가 각종 특례상장의 심사 기준을 높이고 있는 것은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다. 이전과 같은 잣대로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거래소의 공식 입장이지만 각종 기업의 상장 주관 업무를 담당하는 증권사에서는 심사 당국이 △사업 지속성 △재무 안정성 △지배구조 △소송·분쟁 현황 등 기업 안정성 관련 여러 비정량 지표를 중심으로 특례상장 허들을 높이면서 심사 통과율이 떨어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한 증권사 임원은 “예전보다 특례상장 예비심사 통과가 어려워진 것은 명백하다”며 “매출 성장·지속성을 설득하는 작업이 특히 쉽지 않다”고 전했다.
투자자 보호라는 취지에도 특례상장 제도가 과도하게 어려워지면 기술력에 의존해 사업을 키우는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이 위축될 수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흑자를 거둬야 추진할 수 있는 일반 상장과 달리 각종 특례상장은 적자 상태여도 기술·사업모델 잠재력을 기반으로 기업공개(IPO)를 추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심사 허들이 과도하게 높아지면서 뛰어난 잠재력에도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사업이 좌초되는 사례가 늘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벤처캐피털(VC) 대표는 “높은 미래 성장성을 갖고도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기업이 늘면서 제도가 사문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X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