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1위 대학으로 손꼽히는 하버드는 기금운용 규모와 역사에서 다른 대학을 압도한다. 2위 예일대는 30년간 투자를 이끈 고(故) 데이비드 스웬슨이 대학을 넘어 전세계 투자업계의 스승으로 꼽힌다. 3위이자 실리콘밸리에 있는 스탠퍼드는 재학생의 구글 창업에 투자해 대성공을 거뒀다.
이처럼 미국 대학들은 기금 투자가 대학의 경쟁력은 물론 혁신의 마중물이 된다고 확신한다. 대학 재정이 탄탄해야 우수한 교수진과 학생을 유치하고 이들이 연구 개발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 키운 스타트업이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 스타트업)이 되고 이들이 일자리와 산업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미국은 기금운용 수익의 5%를 대학 재정에 지급하고, 남은 기금도 장래를 위해 일정하게 재투자하는 원칙이 법제화 되어 있다. ‘5%’룰은 미 정부가 세금을 면제하는 대신 대학기금에 부여한 의무로 하버드대학이 기금운용을 본격 시작한 1974년 이래로 이어진 원칙이다. 2007년에는 대학 재정을 장기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기금 규모를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하는 법안도 통과됐다. 대학 기금 수익에 과세할 뿐만 아니라 수익의 전부를 대학에 돌려주게 한 한국과 정반대다. 그 결과 하버드대 예산의 40%, 예일대의 35%는 대학 기금 투자 수익에서 나온다. 대학이 정부는 물론 외부 영향 없이 학문 탐구와 연구만 힘쓸 수 있는 이유다.
기금 운용을 책임지는 미국 대학의 최고투자담당자(CIO)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초장기 분산투자'다. 이 원칙을 처음 제시한 인물은 1985년부터 2021년 5월까지 예일대 CIO를 맡았던 데이비드 스웬슨이다. 미국도 그가 등장하기 전에는 채권에 40%를 투자하는 보수적인 투자자였다. 스웬슨이 대체투자 비중 확대와 장기분산 투자를 내세운 새로운 운용 모델을 제시하고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수익을 내면서 판도가 완전이 바뀌었다. 스웬슨 덕분에 1994년 5억 달러(6700억 원)에 머물러 있던 예일대의 기금 규모는 2021년 말 423억 달러(56조 7000억 원)로 85배 불어났다.
스웬슨의 등장 이후 미국 대학들은 장기 목표에 입각한 운용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주로 해당 대학 출신인 투자 담당자들은 스스로를 교직원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월가에서 경력을 쌓은 투자 전문가다. 예일대와 스탠포드 투자 담당자는 최고의 운용사를 실사해 선택하고 돈을 맡긴 후에도 평가해 퇴출 시키기도 한다. 자산별 가격 변동에 따라 투자 비중이 달라지지 않도록 조정하는 리벨런싱은 물론 시장 변동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시나리오 분석도 담당한다.
실제 스웬슨은 그의 책 ‘포트폴리오 성공운용’에서 KKR 등 글로벌 사모펀드가 대학기금 수익보다 자신들이 가져갈 보수에 집착해 펀드 규모만 키우고, 폐업한 운용사의 손실률이 사모펀드 업계 평균 수익률에 잡히지 않는 실태를 꼬집었다. 그는 “지난 20년 간 평균적인 사모투자 수익률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예일대는 30%의 수익을 냈다"면서 “사모펀드 운용사 중 상위 10%를 찾고 이들이 대학 기금과 함께 투자하는 공동 운명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일대와 함께 가장 우수한 투자 실적을 내고 있는 하버드대는 1974년 하버드매니지먼트컴퍼니(HMC)라는 독립 운용사를 설립해 기금 운용을 전담하도록 하고 있다. 3억 달러(4000억 원)로 시작한 HMC의 운용 기금은 2021년 말 기준 532억 달러(71조 3600억원)로 무려 177배 증가했다.
하버드대는 2021년 34%의 기금 운용수익을 기록했는데 당시 사모주식 부문에서만 77%의 수익을 냈다. 같은 기간 에너지 자원과 채권 등이 1~3%의 수익을 낸 것을 감안하면 사모주식이 그해 전체 수익을 책임진 셈이다.
이처럼 미국의 대학 기금은 기업 경영권을 사고 팔거나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사모펀드에 전체 자산의 30~40%를 출자해 연 평균 30%가량의 높은 수익률을 거두고 있다. 가장 큰 비결은 대학기금이 일반 기관투자자와 달리 일정 수익만 대학에 돌려주면 나머지를 초장기로 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투자 제한이나 과세 부담 없이 자유롭게 자금을 운용하고 그 과실을 다시 투자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해 마다 달라지는 시장의 변동성이 투자 전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재정 계획이 필요하다.
특히 대학 기금은 연기금이나 국부펀드보다 규모가 작지만, 더 길게 투자하면서 사모투자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다. 스탠포드 투자기구인 스탠포드매니지먼트컴퍼니 관계자는 “연기금이나 국부펀드는 할당된 기금 규모가 너무 커서 충분히 검토할 여력이 없다"면서 “대학기금은 만기가 길고, 엄격한 투자 검토를 거치기 때문에 투자 수익률이 연기금보다 높다”고 설명했다.
로버트왈라스 스탠포드대 CIO는 “매년 대학의 예산을 지원하는 동시에 미래 세대도 혜택을 보게 하는 것이 스탠포드의 기금운용 목적"이라면서 "이를 위해 투자 대상은 사모펀드를 포함한 주식 비중이 높고, 분산 투자를 원칙으로 장기 운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학들은 장기적으로 운용한 기금 수익을 교내 시설 투자나 연구활동 지원에 활용한다. 기금 규모가 곧 대학의 경쟁력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대학경영협회(NACUBO)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대학 기금 순위는 하버드대(494억 달러)가 1위, 이어 텍사스대(426억 달러), 예일대(413억 달러), 스탠포드대(353억 달러), 프린스턴대(358억 달러) 등의 순이었다. 지난해 US뉴스가 발표한 '2022~2023 대학 랭킹'에서 프린스턴대가 1위, MIT 2위,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예일대가 공동 3위를 차지한 것과 대동소이한 순서다.
특히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에서도 공대에 강점이 있는 프린스턴대와 실리콘밸리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는 스탠포드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프린스턴대와 스탠포드대는 주지사 차원의 적극 지원과 동문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유치 등으로 최근 벤처캐피탈 분야에서 특히 활발한 투자 활동을 벌이고 있다. 프린스턴대에서 벤처캐피탈을 지원하고 있는 담당자는 “뉴저지 주가 프린스턴대의 투자 활동을 적극 지원하기로 하면서 교수진과 학생들의 연구활동 및 창업 욕구가 어느 때 보다 고조되어 있다”며 “기금 증가에 따른 학교의 다양한 투자 지원은 여러 방면에서 대학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뉴욕·샌프란시스코 박시은·임세원기자good4u@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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