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사업 재편 방정식이 분할에서 합병으로 바뀌고 있다. 유동성이 풍부했던 2~3년 전까지는 신규 사업을 분할시켜 투자를 유치한 후 상장하는 수순을 밟았지만 상법 개정으로 쪼개기 상장이 불가능해지고 고금리로 자금줄이 조여오자 계열사끼리 합병해 효율을 높이는 식이다. 당분간 업황이 어려운 2차전지와 석유화학은 물론 대미 투자를 늘려야 하는 조선과 방산 역시 계열사 숫자보다는 덩치를 키우기 위해 합병을 선택하면서 이 같은 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28일 투자은행(IB) 업계와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자산 5조 원 이상의 공시 대상 기업집단의 종속회사 수는 2024년 5월 3318개에서 1년 3개월 만인 이달 기준 3289개로 29개 줄었다. 올해 5월 신규로 4곳의 대기업집단을 추가했음에도 개별 숫자는 감소한 것이다.
특히 대기업집단 중 가장 활발하게 계열사를 늘려왔던 SK와 카카오는 1년 만에 계열사 수를 34개 줄였다. 이들 기업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사업 재조정에 나섰으며 일부 지분이나 계열사 매각을 추진하는 동시에 적정가에 매각이 어려운 경우 계열사 간 합병이나 편입을 이어왔다.
SK그룹은 지난해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에 이어 2차전지 계열사 SK온이 수익성을 갖출 최소 1년 이상의 기간을 버티기 위해 알짜배기 계열사인 SK엔무브를 합병시켰다. 카카오는 핵심 사업인 인공지능(AI)과 카카오톡에 집중하기 위해 게임·엔터테인먼트·모빌리티 분야에서 매각과 합병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호황기를 맞아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적극적인 대미 투자 채비에 나선 HD현대는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의 합병을 결정하고 올해 12월 통합 HD현대중공업을 출범시킨다. 주요 경쟁국인 중국과 일본에서 각각 1·2위 조선사가 합병을 완료한 만큼 HD현대중공업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체적인 역량 강화에 나선 모습이다.
대기업 관계자는 “2년 전까지만 해도 각 계열사가 알아서 투자 유치로 사업을 확장하라는 분위기였다면, 최근에는 중복되거나 부실한 사업을 줄이기 위해 지주사가 중심이 돼 계열사 간 합병과 편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의 합병 러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업황 변화와 함께 규제 환경이 달라진 게 주 배경으로 해석된다. 2차전지·유통·플랫폼 등 업황이 하락한 기업은 알짜 계열사를 붙여 추가로 자금을 조달하거나 손실 부담을 줄이고 조선·방산 등 업황이 상승한 기업은 규모를 키워 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위한 행보다. 삼각 합병이 허용되고 금산분리가 완화된 동시에 쪼개기 상장(중복 상장)을 금지한 법 개정 움직임 역시 분할보다 합병에 무게를 싣게 만들고 있다.
컨설팅 업계 관계자는 “자회사끼리 합병은 중복된 조직과 시설을 통합해서 인건비와 관리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다”면서 “상장기업의 가치 제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물적 분할 후 상장이 막힌 것도 합병이 많아진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조선은 대표적인 자회사 간 합병이다. 모회사인 HD한국조선해양의 자회사였던 두 기업을 합치면서 싱가포르 투자법인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기존에 있던 베트남과 필리핀 법인들을 하나로 관리할 수 있다. 특히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가 요구하는 주식매수청구권에 따른 비용만 제외하면 실질적인 현금 유출 없이 신주만 발행해 HD현대미포조선 주주에게 지급하면 된다.
나이스신용평가는 보고서를 통해 “HD현대중공업이 보유 중인 유휴 도크(건조 설비) 2개와 HD현대미포의 유휴 도크 중 2개를 함정 등 특수선 건조에 활용할 수 있다”면서 “합병으로 해외 투자법인을 신설한 것은 국내보다 생산성이 높은 해외 사업장 투자에 긍정적인 요소”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방대하게 펼쳤던 사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목적도 크다. 올해 들어 신세계그룹 이마트는 2021년 인수한 G마켓의 지분을 출자해 알리바바와 합작법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 지배구조를 단순화하기 위해 합병을 선택했다. 동원그룹은 상장사였던 동원산업이 계열사이자 상장사인 동원F&B를 100% 자회사로 편입하면서 중복 상장 이슈를 해소하고 흩어진 연구개발(R&D) 조직을 통합했다.
합병은 어려운 시기를 버티는 대안이 되기도 한다. SK그룹은 그룹의 차기 먹거리인 SK온의 업황이 내년 이후 좋아질 것으로 보고 SK엔무브와의 합병 카드를 꺼냈고 투자자에게 약속한 SK온의 상장 기한을 늦췄다. SK온의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 역시 지난해 SK E&S와의 합병을 통해 자산 100조 원의 에너지 기업으로 거듭나면서 SK온 정상화에 대한 시장의 억측을 잠재웠다. 합병 이후인 지난해 4분기 SK이노베이션은 흑자 전환을 달성했다. SK온은 기존 재무적투자자(FI)의 탈출 러시 속에서 SK엔무브와의 통합과 SK이노베이션의 보증으로 메리츠금융그룹을 통해 총 5조 원의 자금 조달을 추진 중이다.
기업 지배구조 전문 변호사는 “국내 기업들은 합병에 대해 꺼리는 분위기였다”면서 “이 같은 분위기는 여전하지만 SK그룹처럼 사업 리밸런싱을 하거나 반대로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로 인해 HD현대 등 조선·방산 등 일부 업종에서 합병 사례가 이례적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합병 사례가 늘어나면서 합병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 상법 개정으로 허용한 삼각 합병이나 역삼각 합병은 모회사가 인수하고 싶은 사업만 떼어서 자회사와 합병하거나 새로 인수하는 회사가 기존 자회사와 합병해 사라져도 인수하는 회사의 사업권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 기업 관련 변호사는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나 LG생활건강의 아베오 인수 등 주로 해외 기업 인수 과정에 활용됐고 국내에서는 복잡한 절차 때문에 3개의 계열사가 순차적으로 두 번의 합병을 거듭하면서 사실상 삼각 합병의 효과를 누려왔다”고 했다.
IB 업계에서는 주요 5대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순환 출자 구조를 해소하지 못한 현대차그룹이 이재명 정부 들어 지배구조 개편에 속도를 내면서 합병 방식을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글로벌 사모펀드(PEF) 관계자는 “예상보다 빠르게 기업 정책 환경이 달라지면서 현대차그룹 내부적으로 많은 고민이 있을 것”이라며 “현대 글로비스 등 주력 계열사의 기업가치를 올린 뒤 주주들의 반발 없이 합병하는 정공법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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