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환 금융위원장이 취임 이후 줄곧 증권사들이 모험자본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각종 규제에 가로막혀 있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종합금융투자사업자들은 기업 신용공여 활용이 제한될 뿐만 아니라 금융지주 산하 증권사들은 이중 규제로 묶여 적극적으로 기업 투자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토로하는 실정이다.
11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국내 9개 종투사의 자기자본 규모 61조 8000억 원 대비 기업 신용공여(22조 3000억 원) 비중은 36.1%다. 자산 3조 원 이상 종투사는 자기자본 대비 200%까지 기업을 대상으로 신용공여를 할 수 있지만 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마저도 신용공여의 62.9%가 대기업에 쏠렸고 중소기업은 8.9%에 불과하다.
정부가 종투사의 신용공여 한도를 100%에서 200%로 늘리면서도 정작 확대된 한도를 중소기업에만 쓸 수 있도록 제한한 결과 오히려 기업 신용공여 자체가 위축된 것이다. 도입 당시부터 중소기업에만 대출하라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에도 강행했으나 실제 효과도 거의 없다. 종투사들은 기업 신용공여 한도를 200%로 통합하되 부동산이나 대기업 대출 등 부문별로 상한을 정하는 식으로 규제를 바꿔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증권사들은 은행에 비해 여신 전문성이 떨어지고 개별 중소기업을 분석할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데 할 수도 없는 것을 자꾸 하라고 하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들은 영업용순자본비율(NCR)에 국제결제은행(BIS) 비율까지 이중 규제를 호소하고 있다. NH투자증권·KB증권·하나증권·신한투자증권·우리투자증권 등은 각 금융지주의 연결 재무제표에 포함된다. 따라서 벤처 투자 등을 확대할수록 위험가중자산(RWA)이 늘면서 BIS 비율이 하락한다. 비은행 계열 증권사들은 BIS 비율과 무관한 만큼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반면 한국투자증권은 7000억 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해 별도 기준 자기자본 10조 원을 넘기면서 발행어음 한도를 늘리는 등 적극적인 투자 확대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정책 실행 이후 금융지주들이 배당 등 주주 환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모험자본 투자는 더욱 어려워졌다. RWA가 늘어날수록 배당 등 주주 환원 여력을 판단하는 보통주자본비율(CET1)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금융지주들이 CET1 관리를 위해 RWA 관리를 강화하면서 펀드 출자가 급감하고 증권사들의 신규 투자마저 중단되기도 했다. 금융지주들이 올해도 연간 RWA 증가율을 4~5% 이내로 관리하겠다고 나선 만큼 모험자본 투자가 쉽지 않은 환경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들은 BIS 비율을 산정할 때 연결 예외로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근거가 되는 바젤Ⅲ가 국제 기준인 만큼 쉽지 않다. 해당 사안은 금융 당국 내부에서도 이견이 큰 사안이다. 이 같은 요구가 제기되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바젤Ⅲ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증권사에 맞는 범위 안에서 논의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종투사 자본을 직접적으로 확충하기 위해 은행 자회사의 손자회사로 증권사를 허용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1분기 중 벤처펀드에 대해 일괄 적용되는 위험가중치를 400%에서 자산별로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완화한다는 방침이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반응이다. 국내 한 대형 증권사 대표는 “정부가 기업금융을 해달라고 요구하면서도 규제는 그대로인 상황”이라며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데 증권사들이 기업을 지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윤성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증권사들이 자기자본으로 중소·벤처기업에 장기간 주식을 보유하는 ‘고위험·고수익 추구 형식’의 모험자본 공급이 극히 제한적인 상황”이라며 “증권사들이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측면에서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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