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010130) 경영권 분쟁은 기업 지배구조 논란을 넘어 공정거래 제도의 허점이 드러난 사례이기도 하다. 최대주주인 영풍(000670)·MBK파트너스 연합의 의결권을 제한하기 위해 고려아연 경영진이 해외 손자회사를 활용해 의도적으로 순환출자 고리를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법의 빈틈을 겨냥한 편법 행위’라는 비판도 적잖았다. 특히 이 과정에 여러 법률 전문가들이 개입해 법이 허용하는 한계선을 시험하는 설계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더욱 파장이 컸다.
1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는 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순환출자나 상호출자 관련법에 루프홀(규제 구멍)이 있는 것 같다"며 "해외 기업을 이용한 우회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부 차원에서 편법적 순환출자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고려아연의 임시 주주총회를 하루 앞둔 올 1월 22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일가는 보유 중이던 영풍 주식 10.3%를 호주의 손자회사 선메탈코퍼레이션(SMC)에 넘겼다. 이 거래로 고려아연→선메탈홀딩스→SMC→영풍→고려아연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가 형성됐고, 상법상 순환출자 구조 내 회사들 간의 의결권은 제한됐다. 이로 인해 영풍은 다음날 주총에서 표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됐고, 최 회장 측은 단 한 번의 지분 이동으로 상대 진영의 무기를 빼앗으며 경영권을 지켜냈다.
논란의 핵심은 이 과정에서 법의 취지가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점이다. 공정거래법은 신규 순환출자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지만 규제 대상을 국내 계열사에 한정해두고 있다. 해외 법인인 SMC는 형식상 규제에서 빠져 있었고, 최 회장 측은 이를 근거로 합법적 방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 사례를 두고 “법 조항을 정면으로 어기지는 않았지만 입법 목적을 교묘히 피해간 전형적 탈법”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고려아연은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국내 대형 로펌의 자문을 받아 상법과 공정거래법 등을 검토하며 대응 방안을 마련했다. 초기에는 김앤장이 핵심 자문을 맡았고 임시주총 관련 가처분 소송은 담당 변호사가 율촌으로 이직하면서 율촌이 새로 선임됐다. 업계에서는 법률 자문 과정에서 해외 손자회사를 활용한 구조가 마련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영권 분쟁의 향방이 걸린 상황에서 법률 전문가들이 제도의 빈틈을 찾아내 이를 실제 지분 구조로 옮겨 놓은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법률가들이 제도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순환출자를 설계했다는 점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며 “이런 방식이 용인되면 앞으로도 유사한 시도가 이어질 것”이라고 쓴소리를 날렸다.
공정위는 올해 5월 고려아연과 KZ트레이딩(구 서린상사)에 조사관을 보내 영풍 지분 매입 자금 흐름과 거래 구조를 살펴봤다. KZ트레이딩과 SMC 결제 대금 이동 내역이 등장하면서 일각에선 단순 지분 이동을 넘어 준비된 계획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정치권도 움직여 김남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외 계열사까지 규제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입법조사처도 규제 범위 확대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번 사안의 본질은 형식적 합법과 실질적 위법 사이의 경계에 있다. 최 회장 측은 “법 조문상 문제없다”는 주장을 폈지만, 공정위가 입법 취지를 들어 탈법으로 판단하면 경영권 방어 수단은 불법 구조가 된다. 주총 하루 전날 해외 계열사로 지분을 넘기고 이를 통해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봉쇄하는 행위가 과연 주주와 시장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적지 않은 소액주주와 투자자들은 회사 자원이 경영진 지위 유지에 쓰였다는 점에 불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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