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업계가 시끄럽다. 가격 하락과 과잉 공급이 산업 전체를 위협하고 있으며 생산량 감축을 비롯한 과감한 구조조정 없이는 공멸할 위험에 처해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문제가 석유화학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발 가격경쟁에 이어 미국발 관세전쟁이 산업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자동차부품업·건설업·유통업 등 여러 산업이 구조조정의 기로에 놓여 있다. 글로벌 공급 과잉, 기술 격차, 내수 침체, 가격경쟁 등 복합위기에 직면하면서 사업재편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과제가 됐다.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얘기할 때 조선업의 성공 사례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요 감소와 치열한 가격경쟁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중소형 조선사들은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을 거치며 인력 감축, 자산 매각,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등 고강도 자구책을 실행했다. 정부도 정책금융과 제도적 지원으로 생존 기반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대우조선해양은 한화에 매각됐고 이후 한화의 방산·글로벌 사업과 시너지를 내게 됐다. 이러한 사업재편에 힘입어 오늘날 조선 산업은 한미 조선업 협력 사업인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통해 글로벌 1위 산업으로 재도약하고 있다.
일본의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사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발간된 삼일PwC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석유화학 산업은 40년에 걸쳐 세 차례 구조조정을 단행해 과잉설비 해소, 고부가 전환, 글로벌 확장을 이뤘다. 일본 정부는 ‘산업재생법’을 통해 규제를 완화하고 기업이 자율적으로 설비를 정리하거나 합작으로 전환하는 시장주도형 구조조정을 지원했다.
한국 정부도 최근 석유화학 기업들과 사업재편 협약을 체결하고 연말까지 최대 370만 톤 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NCC) 감축 계획 제출을 요구했다. 계획의 진정성에 따라 연구개발(R&D) 지원, 세제 감면, 금융 패키지 등 인센티브를 제공할 방침이다. 정치권에서도 석유화학산업지원특별법이 발의되고 인수합병 과정에 필요한 기업결합승인을 용이하게 하는 기업활력법 개정안이 논의되는 등 지원책을 모색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구조조정을 위해 기업활력법상 사업재편 절차와 지원 제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한다. 기업활력법은 공급 과잉 산업의 선제적 구조조정과 사업재편을 위해 2016년 제정된 법률로, 일본의 산업재생법을 토대로 국내 상황에 맞게 입법이 추진됐다. 공급 과잉 업종에 전폭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나 입법 과정에서 실제 혜택과 지원은 많이 축소됐다.
필자는 과거 사업재편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기업들이 사업재편 계획을 제출하고 기업활력법을 통해 지원받는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처럼 산업 전반에 영향을 줄 만한 대기업의 사업재편 사례는 거의 없었고 중소기업에도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못해 아쉬웠다. 구조조정이 필요한 산업마다 특별법이나 별도의 지원 대책을 만들기보다 이미 제정돼 있는 기업활력법에서 필요한 부분을 개정해 국가 핵심 산업에 대한 신속하고 다양한 지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 구조조정은 단순한 생존 전략이 아니다. 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과제다. 정부는 제도적 활주로를 깔고 기업은 시장 원리에 따라 스스로 변해야 한다. 조선업이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지금이 바로 미래 사업으로 재편하기 위한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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